며칠 전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멍해졌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실수들이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했던 중우정치, 즉 판단력을 잃은 군중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은 고대 그리스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아테네가 어떻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스스로 목을 조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교훈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지 내 경험과 생각을 담아 풀어보려고 한다.

아테네는 왜 민주적으로 자살했을까
사람만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자살한다. 이 말은 B.C 405년 아테네의 몰락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다. 왕정이나 귀족정은 자기 파괴를 잘 하지 않지만, 중우정치는 다수결 원칙이라는 명목 아래 공동체 전체를 절벽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모두가 책임을 지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구조가 가장 무서운 점이다. 참고자료에서 언급된 것처럼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 패권을 놓고 27년간 벌인 전쟁인데, 이 전쟁의 종반부에서 아테네의 자폭 장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B.C 413년 시라쿠사 원정은 아테네의 자만이 낳은 참사였다. 삼단노선 200척과 중장보병 1만 명을 잃었고, 전투 가능한 시민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런데 B.C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운 좋게 스파르타 함대를 격퇴하면서 아테네에 평화 협상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민회(18세 이상 남성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전투 중 폭풍우로 익사한 병사들의 유가족이 장군들의 구조 미흡을 규탄했고, 민회는 승리를 이끈 장군 8명을 집단 처형하고 2명은 해임했다. 한 명 한 명 심리하지 않고 패키지로 처리한 절차는 불법이었지만, 군중은 피에 굶주린 상태였다. 생각 있는 시민들이 절차상 하자와 변론권 미흡을 지적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아테네는 베테랑 장군들을 스스로 죽였고, 이듬해 B.C 405년 헬레스폰트 해전에서 함선 160척과 포로 3천 명을 잃으며 완전히 멸망했다.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가의 등장
페리클레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후 아테네 정치의 구심점은 사라졌다. 클레온 같은 선동 정치가(Demagogue)들이 등장해 민회의 하층 시민 감정에 호소하며 포퓰리즘에 빠졌다. 그는 B.C 425년 스파르타의 화평 제안을 거부했고, 장기적인 전쟁 종식 기회를 날려버렸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인간관계에서 정의는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또한 “모든 악의 근원은 탐욕과 야심에서 비롯된 권력욕이며,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광신 행위를 부추긴다.” 제 생각에는 이 문장이 현대 정치의 선동과 여론 조작을 설명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고 느껴진다.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일상화된 지금, 우리는 과거 아테네 민회와 비슷한 환경에 살고 있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길고 논리적인 글을 밀어내고, 분노가 이성보다 먼저 반응한다. 철구와 신태일이 페이스북에서 유행을 퍼뜨렸을 때 그 영향력을 본 세대는 자극적인 언어와 기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미디어 환경이 곧 사고방식을 결정한다. 따라서 유튜브에서 범람하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경도된 대중은 ‘내 편과 네 편’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사실 검증을 생략한다.
중우정치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과정
중우정치의 핵심은 ‘다수가 옳다’는 전제 아래 숙고와 법치보다 군중심리와 감정이 앞서는 데 있다. 미국 건국자 제임스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제10편에서 순수한 민주정과 대표에 의한 공화정을 구분했고, 대표제와 넓은 정치 공동체가 파벌과 감정의 폐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소중하지만, 다수의 의사가 헌법과 법치, 권력분립 안에서 절제될 때만 자유를 지키는 제도가 된다. 그 절제가 무너지면 다수결은 소수의 권리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전락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현상이 특정 이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빨간당이든 파란당이든, 강성 지지층의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은 언제나 같은 패턴을 보인다. 분노할 적을 만들고, 비난할 타겟을 설정하며, 우리 편만 정의라는 단순한 구도를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 비판과 이성적 판단의 지성은 사라지고, 집단주의와 권력 독점이 공고해진다. 히틀러의 유겐트와 모택동의 홍위병도 같은 메커니즘 위에서 움직였다.
한국 정치의 현실과 미래
참고자료에서 언급된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현재 한국 정치를 보면 부패하고 무능한 정당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고, 팬덤 정치가 합리적 절차를 무너뜨리는 모습이 반복된다. 이란 전쟁으로 유럽의 유가가 리터당 4,000원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리터당 2,000원을 유지하며 선제적으로 에너지를 확보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선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통령이 이재명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되면 한계가 드러나겠지만, 적어도 정부를 비난하고 조롱하기보다 격려할 일이다.
내가 눈여겨보는 정치인은 김성식 의원과 김상욱 의원이다. 한나라당 출신의 김성식 의원은 국민의당 소속으로 우리 지역구에 출마했을 때 ‘사표’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나는 그의 합리적 보수 성향을 믿고 지지했다. 그는 당선되었고, 지금은 이재명 정부에서 발탁되어 역할을 하고 있다. 빨간당 지지자들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받겠지만, 나는 국가를 위해 역량을 발휘하는 선택을 응원한다. 김상욱 의원 역시 영남에서 보수의 가치를 외치다가 고립되고, 결국 진정한 보수를 위해 이적한 인물이다. 그들의 진정성과 희생 정신은 한동훈이나 이준석 같은 기회주의자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중우정치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감정에 선동당하는 국민이 늘어날수록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에 가까워진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를 스스로 묻는 습관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뿐 아니라 제3자, 제4자의 시각에서도 생각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평면처럼 보이는 사각형의 반대쪽 면, 안과 밖, 대각선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고대 아테네의 몰락은 당장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대중주의 포퓰리즘이 얼마나 위험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나는 김성식과 김상욱 같은 인물을 지지하고, 빨간당의 완전한 재건을 촉구하며, 파란당이 반사이익에 취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지금 한국 정치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의견을 나누며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다.





